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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

강희맹의 집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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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관리자 작성일20-10-15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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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맹의 집터
서울역에서 서대문 쪽으로 가는 길에 염천교라는 다리가 있다. 다리라고는 하지만 그 밑은 물이 아니라 철길이다. 부산, 목포에서부터 숨가쁘게 달려온 열차가 최종적으로 멈추는 곳이 서울인 것 같지만, 사실은 휴전선 코밑의 문산까지 이어져 있다. 염천교 밑을 달려가는 철길은 바로 통일의 비원을 안고 북으로 북으로 뻗어가는 미래의 국토의 대동맥이 될 것이다.

 
그 염천교에서 남대문 사이의 중간 부분에 정3품을 하사받은 아름드리 소나무가 있었다. 속리산에 정2품송이 있는 것은 국민 누구나가 다 아는 사실이지만, 남대문 바로 바깥에 정3품송이 있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지가 않다. 무엇보다도 당상관품작을 하사받은 그 주인공 소나무가 남아있지 않아서일 것이다.

 
대부송(大夫松)으로 불려졌던 이 소나무가 벼슬을 하게 된 소이는 이렇게 전해져 온다. 남대문 성밖 아름드리 고송이 있던 곳은 바로 강희맹의 집터(서울특별시 중구 순화동 193-212 일대로 추정)였다. 강희맹(姜希孟, 1424~1493)은 예조, 형조, 병조판서 등을 두루 거친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서 경사(經史)와 전고(典故)에 통달한 당대의 뛰어난 문장가이기도 했다. 본관은 진주인데, 진주 강씨 일문의 마지막 등불이라는 풍수설화의 주인공이기도 한 인물이다. 이 설화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예로부터 진주에는 두 군데의 봉란(鳳卵)자리가 있었다. 동란(東卵)은 고려 때 상원수 강감찬 장군과 함께 거란족을 물리친 부원수 강민첨 장군의 생가 뒷산을 말한다. 지금 진주 강씨 은렬공파는 강민첨을 파조(派組)로 하고 있는데, 은렬(殷烈)은 강민첨의 시호이니 그 후손들이 은렬공을 기리고자 하는 마음에서 그리한 것이다.
서란(西卵)의 봉란자리는 진주 강씨 시조 강이식(姜以式)의 9세손 강구만(姜九萬)이 살던 곳으로 현 진주시 상봉서동에 있다.


강씨 문중에 전해져 오는 가첩(家牒)에 의하면, 강구만 대(代)에 이르기까지 강씨 일족들이 출세를 계속하자 왕실에서 그 까닭을 조사하여 보고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그 집 뒤의 산이 대봉산(大鳳山)이고 집 안에는 봉황의 알을 뜻하는 바위가 있다고 보고되었다. 대봉산의 봉황은 임금을 뜻하는 것이요, 이에 알까지 품고 있으니 머지않아 강씨 왕조가 탄생될 것이라는 참언이 뒤따랐다.


왕실에서는 즉시 알을 깨버리게 했으며 대봉산의 이름을 비봉산(飛鳳山: 봉황이 날아가버린 산)으로 바꾸어 버렸다. 일설에는 깨진 봉알에서 피가 흘러나왔다고 전한다. 그 뒤로 강씨 일문에서는 조선 초기의 강희맹을 끝으로 걸출한 인재가 나지 않았다고 한다. 공경대부, 정승판서가 예전처럼 나지 않자 강씨들은 봉란을 다시 만들어놓고 봉황이 날아오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다고도 한다(이상은 최영주의 「신한국풍수」에서 재인용한 내용이다.)
강희맹은 이런 풍수설화를 가지고 있는 가문의 마지막(?) 인물인 셈이니, 그 인품과 학문이 일세를 풍미했다. 


그가 형조판서로 있었을 때에 판결이 공명정대하여 억울하게 옥에 갇힌 사람이 거의 없다시피 하자 나라에서 포상을 내리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는 "옥사를 없게끔 밝고 좋은 정치를 하였기 때문에 옥이 비게 되었으니 모든 것이 주상 전하의 크나큰 선정(善政) 때문이옵니다" 하며 자신의 공을 임금에게 돌린 겸손한 인물이기도 했다. 겸양의 미덕을 이만큼 잘 보여준 인물도 흔치 않았던 것이다.

 
강희맹도 인품과 학식이 출중했지만, 그의 내자인 안씨 부인 또한 명성이 남다른 바가 있었다고 전한다. 성종 시기에 임금님의 원자인 연산군이 돌도 채 되기 전에 심한 중병을 앓자, 왕실에서는 법도 있는 집에 옮겨 낫게 한다는 관례에 따라 후덕한 안씨 부인이 있는 이 대부송(大夫松)의 집에 원자를 보내도록 하였다. 안씨 부인은 지극 정성으로 간병하고 잘 돌보아서 어린 연산군을 쾌유시켰고, 이후 여러 차례 개구쟁이 연산군의 위기를 슬기와 지혜로써 구해주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것이 연산군이 실꾸러미를 삼킨 이야기이다. 「연산군 일기」에 따르면, 연산군은 그 유년시절에 몹시 장난이 심하였던 모양이다. 하루는 실꾸러미를 목에 삼켜서 질식 직전에 이르렀는데, 아무도 조처를 하지 못하고 당황하고 있었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안씨 부인은, 유모를 시켜 양귀 밑을 껴잡게 하고, 손가락을 넣어 실꾸러미를 꺼내 죽음 직전의 연산군을 살려내었던 것이다.


그러고 나서도 자신의 일을 불문에 붙이라고 당부하기를 잊지 않았다. 시정들이 호되게 벌 받는 것을 걱정해서였으니, 그 사려 깊음이 남달랐던 것이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란 연산군은 왕위에 오른 이후에 폭정을 일삼기는 했으나, 그래도 안씨 부인의 인품과 덕망을 흠모하여 자주 입에 올렸다고 한다. 모정(母情)이 그립고 사무쳤던 연산군이 아니었던가. 어느날은 연산군이 강희맹의 집 앞을 지나다가 집 안의 노송을 보고 안씨 부인의 공덕을 기린다 하여 소나무에 정3품의 벼슬을 내려 대부송(大夫松)이 되게 하니, 벼슬한 소나무의 내력은 이렇게 된 것이다.
기품 있고 후덕한 부인네가 터잡아 살고 있는 곳에는 나무마저 그 품위를 청청하게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사람들이 이 소나무를 지나게 되면 말(馬)에서 내려 깍듯하게 예의를 갖추어야만 했다. 정3품의 대부(大夫)가 늠름하게 버티고 서 있으니, 마땅히 법도에 따라 그리해야만 했던 것이다.
강희맹의 집터는 그 부인의 후덕한 인품과 이를 기리기 위해 벼슬을 내린 대부송(大夫松)으로 말미암아 천고에 그 명성을 떨쳤으나, 지금은 사라져 흔적조차 없다. 예(古)를 잊은 채 오늘을 정신없이 살아가는 모습이 한없이 안타깝기만 하다.

* 강희맹의 묘는 시흥시 하상동 산2에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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